[일기] 2017.01.11 생일의 의미
친구들이 놀러 왔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사실 생일이라는 날에 뭔가 의미를 둔 적이 없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날 말고 개인적인 기념일 등에 국한된 얘기지만, 태어난 날뿐만 아니라 뭔가 있었던 사건에 날짜를 지정해두고 주기별로 기념한다거나, 추모하는 것에 의미를 잘 알 수 없다. 날짜를 정해 놓아야만 생각해내고 기념할 수 있다거나 추모할 수 있는 일이라면 평소에 살아가면서 생각조차 잘 나지 않는, 그냥 그런 정도의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던 게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한 가지 공통된 기념일이 생겼다고 해도 모두가 느끼는 그 날의 의미는 각기 다를 텐데, 나에게 특별히 더 가치 있는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 알고 싶었다.
1년에 한 번으로 규정된 날이 아니어도 살면서 문득 떠오르는 날 전부가 기념일이고 추모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아무 날도 아닌데 평소에 먹던 음식보다 조금 맛있는 음식을 사다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내 나름대로 소중한 기념행사다.
생각이 먼저고 날짜 규정은 그다음이다. 조용한 상태로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는 일은 일 년에 두세 번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이란 시간이 갈수록 그런 소중한 감정을 자꾸 잊어버리기만 하니까 너무나 아쉽다. 그래서 글이나 사진이나 그림이나 어떤 수단으로든 기록해서 한가한 모든 시간에 다시 떠올리고 싶었고, 지금 순간조차 곧 잊어버릴 멍청한 미래의 나를 위해 기록을 하는 중이다. 모든 기록은 결국 스스로를 위함이고 소중한 순간들을 잊지 않고자 하는 필사적인 몸짓이다.
생일에 별 의미를 모르겠다고 말하던 내게 친구 M은 '생일이란 네 모든 가능성이 시작된 날' 이라고 말해주었다. 확실히 평소에 살면서 '내 가능성이 시작된 날'을 떠올리며 기념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왜냐면 내가 태어나면서 느낀 신비로운 수많은 감정의 조각들은 조금도 기억이 나질 않기 때문이다.
자기애를 위해서라도 날짜를 정해 놓고 생각조차 안 나는 그 감정이 무엇이었을지 상상하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M 덕분에 생일에 의미에 대해,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어쨌든 친구들은 그날 내가 사는 작은 집에 와줬다. 그 녀석들과는 8년 정도 지속해서 만나고 있는데 이 모임 멤버들은 여전히 흥미롭다.
그 중 한 명인 친구 D는 직업이 스님이다. D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더니 스님이 되었다고 말했다. D의 부모님은 두 분 다 스님이기 때문에 집안 내력상 어릴 때부터 관련 공부를 했고, 관련 학과를 나와서,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D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게 아니라 선택하지 않음을 선택한 거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의 더러운 때라고는 겪어보지 못한 무지몽매한 스님 녀석이 이론만으로 사람들에게 치유 활동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겪어보지 못한 정체불명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는 척하는 것보다 철저하게 이성적인 담론으로 대하는 쪽이 훨씬 더 깔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D는 포켓몬 마스터가 되고 싶어 하는 티 없이 순수한 오타쿠 녀석으로, 원하는 즐거움을 성실하게 누리며 살고 있다. 그런 D를 보며 나는 내 삶에서 가장 원하는 게 뭔지가 명확하지 않다는 게 좀 슬퍼 졌다. D처럼 확실한 목표도 없고, 그럴듯한 욕망도 없고, 욕구도 별로 없고…. 난 대체 뭘 하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한 걸까?
모임 멤버들이 사는 집을 다 가봤지만, D의 거주지만큼은 가본 적이 없다. 아무래도 D는 우리가 너무 세속적이라 부르지 않는 것 같다. 사는 곳이 어떤 산속에 있는 절이라고 했다. 우리는 언젠가 주소를 알아내면, 그 녀석 몰래 치킨을 싸 들고 대웅전에 침입해서 먹어보기로 다짐을 한다. 성탄절에 D의 집으로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고 싶었지만 역시 주소를 몰라서 실패했다.
친구 H가 차 보조석에 앉았다. 그녀는 앉자마자 졸음이 쏟아지는 것 같았지만, 운전자에게 미안하다며 잠에서 깨려고 애를 쓴다. 사실 나는 운전할 때 보조석에 앉은 사람이 잠을 자거나 말거나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보조석에서 졸고 있는 것은 실례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하고 알게 되긴 했지만 여전히 운전자의 시야는 어차피 앞으로 쏠려 있으므로 보조석에 앉은 사람이 구태여 잠을 깨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H는 자면서 잠시만 눈을 감고 있겠다고 잠꼬대를 했다. 그냥 의자를 뒤로 젖히고 잠을 깊이 자는 게 좋을 것 같다. H에게 편하게 내 잠옷으로 갈아입으라고 권했다. H가 입으니까 내가 입었을 때와 모양새가 아주 달랐다. 그 잠옷이 상당히 성적인 잠옷 이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우리는 그녀가 이곳에서 관능적인 것이 재능 낭비라고 하며 웃었다.
친구들은 나에게는 외로움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좋아하는 것으로 보이진 않지만, 적성에는 잘 맞는 것 같다고. 수많은 적성 중에 왜 하필 그런 거에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과연 외로움이 적성에 맞는 인간이라는 게 있을까?
난 늘 계획하고 결정을 하며 살아왔는데 D를 보면서 나도 계획과 결정 없이 살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아마도 불가능할 것 같다. 지금도 언젠가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 것을 할 계획을 짜고 있다.
http://www.bookk.co.kr/book/view/34166
감성적이라 힘든 그대
우리는 풍족하고 편리하며 배부르지만 불행하고 무기력한 노동자들이다. 감성적인 사람들은 예민하기 때문에 생존에 유리하며, 더 잘 보이고 잘 들린다. 우울증에 걸리는 것을 이해를 못 하겠��
www.book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