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6 H씨 관찰일기
코로나 시국에 함께 갇혀 있는 H는 없어선 안 될 소중한 존재다. 집안 어디선가에는 고독이라는 독이 끊임없이 퍼져 나오고 있어서 가만히 있으면 중독되어 정신이 썩어들어가다가 언젠가는 죽게 될 텐데, H의 말에는 해독 성분이 있어서 제정신을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사람 관찰이 취미인 나는, 대상을 찾을 수 없어 방황하다가 유일한 대상인 h만을 관찰했다. 제법 데이터가 모여 관찰일기를 쓴다.
얼마 전 나는 H에게 "언젠가 술을 마시다가 집에 갈 때쯤 휴대전화 앱으로 내 차를 부르는 버튼을 누르면 자율주행으로 내가 있는 장소로 와서 집까지 잘 데려다주는 좋은 시기가 오겠지?"라고 말했다.
H는 열심히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며 그 차는 가격이 굉장히 비쌀 거라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또 무인차가 오다가 발생할 수 있는 사고 종류와 책임자가 누구인지에 관한 문제, 불가피한 사고 발생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해야 옳은 것일지 같은 도덕적인 문제들을 체크하고 있었다.
가볍게 던진 얘기에 이상하게 진지하고 구체적인 답변이었다. 한참을 더 얘기하고 나서야 나는 그런 문제가 종결되고 대량생산이 진행된 먼 미래를 얘기했고 H는 근미래를 얘기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여러 번 그러했음) 그에 사고방식, 사고 방향에 대해 알 것 같았다.
H의 사고방식은 굉장히 섬세하고 구체적이며, 또 현실적이다. 나처럼 아무 생각이나 떠오르면 마구 내뱉는 아이디어형 사람이 아니라 실행형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WPI 검사는 해본 적이 없지만 아마도 나는 아이디얼리스트, H는 에이전트형일 거다.)
형상화를 해보자면 H는 아주 촘촘한 그물망으로 물고기를 잡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나는 그물 줄 사이가 성긴 큰 그물망을 던지는 사람 같다. 큰 물고기라면 잡을 수는 있겠지만 촘촘 그물망에 비해 성공률은 몹시 낮아 보인다.
우리는 대부분 내가 일거리를 만들어내고 H는 뒷수습을 도맡아 하고 있다. 나는 실행력이 좋은 편이지만 구체적이지 못했다. H는 계획이 다 세워지기 전까지 실행에 옮기지 않는 성격이다. H는 짧은 시간에도 많은 변수와 최악의 경우까지 리스트업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매우 신기하다. H는 하나의 작은 할 일에서도 설계도를 짜듯이 치밀하게 순서를 만들고 계획하고 실행한다.
이전까지 만났던 사람 중에 뒷일을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던가? 그런 경험 자체가 없다. 책임감이 많았던 건 늘 내 쪽이었으며 이성적이고 계획적인 것도 나였는데 이런 모습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훨씬 더 구체적이고 섬세하고 계획적인 사람이 일정을 정밀하게 짜주고 있다.. 인생은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거구나.
H의 이런 사고방식이라면 업무적으로 뻔한 트러블이 생길 것 같아서 걱정되었다. 예를 들어 어떤 기획자가 구체적이지 못한 아이디어를 하나 내던진다고 가정하자. H는 그로 인해 발생하게 될 문제들에 대해 빠르게 리스트업 하고 충돌이나 모순에 대해 사전 경고를 할 것 같다. 그러면 실행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다시 구체적인 기획을 해야 해서 기운이 빠진 기획자는 아이디어 내는 것이 더 어려워지지 않을까?
H는 이것에 대해 이미 매뉴얼을 갖고 있었다. 회의에 종류에 따라 말을 아낀다는 것이다. '아이디어 회의'에서는 문제점 목록을 머릿속에서만 작성하고 일체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앞으로 가볍게 이야기하고 싶을 때는 필히 '이건 그냥 아이디어 회의야'라고 미리 선을 그을 필요가 있겠다.
H를 컬러로 표현하자면 시안 색에 스카이블루를 섞은 채도가 높고 밝은 색상이 떠오른다. H는 결코 따듯한 난색 계열의 색상은 아니지만, 밝고 청아한 색상 안에 순수함이 들어있다. 청회색의 우울함이 묻어나는 내 색상과는 전혀 다르지만 지금은 서로의 색이 서서히 계속 섞여서 두 가지 색상 모두 꽤나 모던해져가고 있는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