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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8 믿었던 장소들의 배신

퀘이' 2024. 12. 25. 22:49

이번 재난들로부터 강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우리들은 더 이상 순진하게 속아서는 안된다.

사기를 두 번이나 당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차분하게 상황을 복기해 보자.

2022년 8월 8일. 이름이 붙은 태풍도 뭣도 아닌 정말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비구름으로 인해 중부지방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첫 번째로 신림동 반지하에 살고 있던 일가족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점은 반지하든 뭐든, 집이라는 '장소'이다.

나에게 집은 따듯하고 지친 몸을 편안하게 누일 수 있는 유일하고 안락한 장소이다. 아마도 누구에게나 집은, 세상에 그보다 더 편한 곳이 없을 정도로 일상적이고 평범해서 안정감을 느끼는 공간이다. 그 따듯함 때문에, 갑자기 사람이 죽는다는 엄청나고 끔찍한 재앙이 생길 공간이라고 의심하기가 너무나 어려운 것이다! 이건 믿었던 안정감에 대한 완전한 배신이다.

두 번째로 강남역 맨홀 사망사건. 강남역이라는 대도심 한복판은 사방이 트여있는 개방적인 공간이다. 애써 말할 필요도 없이 이 공간은 매우 넓고 사람의 통행량이 많아서 늘 혼잡하고, 역시나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고 일상적인 공간이다. 강남역은 친구를 만나 즐겁게 놀거나 병원이나 학원을 다니는 공간이지, 갑자기 사람이 죽는다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공간은 전혀 아니었다!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주위에서 도와줄 사람이 무조건 있을 것 같은 믿음이 있었다.

즐거운 장소에 대한 완벽한 배신이다.

세 번째로 태풍 힌남노는 포항을 강타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혔고, 아파트 관리실 방송을 듣고 차가 침수될까봐 주차장에 가서 차를 빼려던 주민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신에게 주차장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가? 적어도 나에게 주차장은, 퇴근 후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이제 집에 들어가 편하게 씻고 누울 일만 남았다는 기쁨이 느껴지는 친숙한 공간이다! 차 빼라고 전화라도 오면 잠옷을 입고 슬리퍼를 땅에 끌며 나가게 되는, 긴장이 풀려 있는 일상적인 공간이라는 말이다. 편안한 장소에 대한 엄청난 배신이다.

이 공간들을 의인화해보면 더욱 경악할 만한 느낌이 든다.

집은 마치 내 가족과 같고, 강남역은 오랫동안 함께 일한 동료와 같으며,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 주차장은 동네 친구와 같다.. 이 공간들은 사람이 죽을 것만 같은 느낌이 전혀 들지가 않는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한 것처럼, 믿었던 장소들로부터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편안함을 느끼던 공간들에 더 이상 안전함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슬픈 일이다.. 앞으로도 기후변화는 안 좋은 쪽으로 점점 더 심각해질 일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이젠 세상 어느 곳에서도 편안한 안전을 기대하긴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오히려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 공간의 고정관념을 깨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경계하는 것만이 재난 상황 속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판단의 기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