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부모님이나 학교 교육에서는 화는 무조건 내면 안된다고 가르치지만 살다 보면 화를 내야 할 상황도 있다. 화를 내야 상대방에게 거절의 의사가 더 명확히 전달되는 경우도 있고, 참고 인내하였지만 더는 참을 수 없는 단계라는 것을 알리는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화를 내지 않고 살다 보니 훈련이 전혀 안 되어 있어서 화를 제대로 낼 수 없다는 데 있다.
화를 낼 때는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을 정도의 상태여야 하는데, 대부분 참다 참다 폭발할 지경에 이르러서야 화를 낸다. 이것은 통제 불가능한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필자가 생각하는 가장 최악의 화냄이다. 이성을 잃은 화냄은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좋은 화냄이란, 즉각적인 대처여야 하고 상대방에게 명확한 의사가 전달되어야 한다. 우리는 화난 상태라고 하면 으레 소리를 크게 내지르거나 과격한 행동을 하는 상태까지 떠올리는데, 이것은 큰 선입견이라 할 수 있다. 화는 굳이 감정을 폭발시키며 낼 필요가 없다. 조용히 화를 내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 이때 상대방에게 화가 났다고 전달하는 좋은 방법은 "나는 지금 화났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단호한 어조로 표정은 최대한 딱딱하게 굳히는 편이 좋다. 눈빛은 상대를 조금 노려보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 한마디 이후 약간의 침묵의 시간을 몇 초 정도 보내고 그 원인을 설명하는 것까지가 좋은 화냄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 감정이 어떤지를 스스로 빨리 알아채고 당당하게 공개하는 일이다.
1단계가 자신의 감정 알아채기인데,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배려가 기본 미덕인 사회여서 대부분의 성인들은 자신의 감정보다 타인의 감정을 헤아리는 것에 더 숙달되어 있다. 과거부터 무리생활을 해오던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은 대화중에 여러 사람들의 감정을 빠르게 읽고 내용의 흐름을 따라가느라 자신의 기분을 신경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늘 자신이 느꼈던 미약한 감정들은 나중에 혼자 있을 때 처리하게 된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여러 사람들과 대화하다가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보통 즉각적인 대처를 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생각해 보니 기분 나쁘네ᆢ'라고 느끼는 일이 종종 있지 않은가? 우리는 생각보다 자신의 감정에 무딘 측면이 있다. 섬세한 친구의 경우 본인보다 더 빠르게 "너 아까 좀 기분 나쁘지 않았어ᆢ? 걔는 왜 말을 그렇게 해?"라고 알려주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이 파악되면 또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을 때는 즉각적인 대처가 가능하다. 타인만큼 자신의 감정도 신경을 쓰는 것이 필요하다.
2단계는 화남을 당당히 공개하는 일이다. 자신의 감정을 헤아리는 것에 성공했다면 내가 어떤 것에 화가 났다는 것을 표현해야 한다. "난 네가 이러저러해서 화가 났어. 그러니 앞으로 너는 이렇게 행동해 줘."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역시 무리 지어 살아가는 동물인 우리 인간들에게 1단계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한국은 특히나 평판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이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않은 문화이다. 인간이라 어렵고 한국인이라 더욱 어렵다. 좋은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잘 못하는데 나쁜 감정을 드러내라니ᆢ 너무나 큰 시련이다. 상대가 눈치를 보게 될까봐 지나치게 배려하다 보니 혼자 조용히 삭히는 편이 더 편한 것이다. 하지만 반복된다면 결국 폭발하게 되어 최악의 화냄의 상황을 맞을 수도 있으니 꼭 그전에 조용한 화냄으로 상대방에게 인지할 시간을 주자.
즉각적인 대처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화남의 상황이 다 끝나고 화를 제공한 상대에게 찔끔찔끔 투덜거려봤자 상대방은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오해만 쌓이기 때문이다. 화가 나게 된 그 상황에서 명확히 지적해서 인지하게 하여 교정할 필요가 있지만, 이는 굉장히 어려운 1, 2 단계들을 거쳐야만 가능한 일이므로 한 번에 하지 못했다고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교정이 안 되어있으면 화나는 상황은 무조건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화남을 삭히며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과 적절한 화냄으로 스스로를 배려하는 것은 중용의 줄다리기와 같다. 결국은 자기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을 지켜내는 일이다. 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의 감정에도 신경을 써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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