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정도 함께 일했던 동료 H가 있다.
그 시절의 나는 아직 젊었고, 야망과 정치로 가득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 많이 닳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누군가가 새로 다가올 때마다, 나는 먼저 마음의 무장을 했다. H를 처음 만났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나와 연차도, 나이도 비슷한 사람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경계할 이유가 되었다.
나는 그녀보다 더 많이 일하려 했고, 더 빠르게 성과를 내고 싶어 했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먼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H는 그런 내 조급함을 모르는 사람처럼, 언제나 자기 속도로 움직였다. 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은 채 조용히 자기 일을 했다. 경쟁도 없고, 공격도 없는 태도였다.
H는 느긋한 사람이었다. 어딘가 멍한 구석이 있었고, 세상에 대해 날을 세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진지하게 걱정하는 건 키우는 고양이의 신장병 정도였다.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나 적의는 거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든 채 서 있는 나 자신을 자주 떠올렸다. 나 혼자 전쟁터에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갑옷은 괜히 입은 것이 아니었다. 예전의 나는, H와 비슷한 얼굴로 세상을 대했다가 깊게 다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선을 긋는 법을 먼저 배워버린 사람이 되었다.
H는 실력 좋은 3D 아티스트였다. 유명한 강사에게 오랫동안 배웠고, 함께 사는 남편 역시 뛰어난 사람이었다. 같은 파트에서 일하다 보니 그녀의 작업 파일이 필요해진 적이 있었는데, H는 망설임 없이 파일을 건네주었다. 보호도, 계산도 없는 손짓이었다.
그녀의 작업 방식은 혼란에 가까웠다. 레이어는 수십, 수백 겹으로 쌓여 있었고, 어떤 순서로 만들어졌는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나는 늘 구조를 세우고, 이유를 만들고, 단계를 나누며 작업해왔다. 질감은 여기, 덩어리는 저기, 묘사는 마지막에. 그런데 H의 작업에는 그런 구분이 없었다. 그저 그 순간 가장 예뻐 보이는 방향으로 손이 움직였을 뿐이었다. 나는 그 사고의 흐름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과물 앞에서는 늘 말이 없어졌다. 그것은 분명히 아름다웠다.
아트를 하다 보면 이런 사람들을 만난다. 나는 머리를 쥐어짜듯 고민해서 겨우 완성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고민의 흔적 없이도 자연스럽게 좋은 결과를 내놓는다. 아마 대부분의 아티스트는 H 쪽에 가까울 것이다. MBTI로 치면 나는 INTJ, 그녀는 ISFP였다. 닮은 점은 거의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H와 함께 있으면 숨이 편해졌다.
내가 실수를 했을 때도 그녀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넘겼다. 실수를 확대하지도 않았고, 내 실력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내가 바쁜 날에는 말없이 야근을 대신해주기도 했다. 그동안 만나왔던 사람들 (날카롭고, 계산적이고, 언제든 등을 돌릴 준비가 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의 재능보다도, 그 태도에 더 깊이 마음이 움직였다.
H와 함께한 시간 동안 나는 조금씩 달라졌다.
무리해서 잘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경쟁하며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저 나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일을 하면 충분하다는 것을 배웠다.
그녀 덕분에, 사람에게 다친 마음은 서서히 풀어졌다. 경계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날을 세운 채 살지는 않게 되었다. 아마도 H는 내가 이런 시간을 지나왔다는 사실을 영영 모를 것이다. 그녀는 그런 걸 알아채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는 훨씬 여유 있는 사람이 되었지만,
H를 만나지 못했다면 경계심을 내려놓고 그것을 깨닫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그런 귀감이 되는 사람이 되어줄 수 있을까? 아무 말 없이도 옆에 있는 것만으로 숨이 편해지는 사람.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
2026년에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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