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남편과 함께 차를 타고 재래시장에 다녀왔다. 이 근처에는 대형마트는 있지만 시장은 없어서 꽤 멀리 가야 했다. 어릴 때는 집 근처에 시장이 있는 게 자연스러웠던 것 같은데 요즘에는 누군가 집 근처에 시장이 있다고 하면 좀 부러운 기분이다.
시장에 도착한 우리는 어색해서 뻣뻣하게 걸어 다니며 북적거리는 인파 속에서 이런저런 상품들을 보며 신기해하고 있었다. 늘 다니던 대형마트에서는 모든 상품에 가격이 적힌 하얀색 스티커가 있는데 시장에는 몇 그램 당 얼마라는 가격 표시가 없으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평소에 마트에 들어오지 않는 식자재들은 시세를 모른다. 어느 가게에서 뭘 사야 좋은 구매를 할 수 있는지도 전혀 모르겠다. 그래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이전에 지나쳤던 가게와 지금 보는 가게의 식재료의 품질과 가격이 어떻게 달랐었는지 떠올리며 비교했다. 나는 마트에서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상품을 고르는 시간이 꽤나 새롭고 즐거웠다.
남편은 시장 안의 한 잡화상 앞에서 칼 가는 도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판매자는 그 시선을 놓치지 않고 갑자기 홈쇼핑의 호스트처럼 칼 가는 방법을 설명하며 직접 시범을 보여줬다. 잘 갈린 칼로 종이를 써는 퍼포먼스를 보며 신기해하고 있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같이 구경하고 있었다. 남편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칼 가는 도구를 구매하고 있었다.
환갑이 넘은 나의 엄마는 쿠팡 멤버십 회원이다. 그녀는 로켓 배송, 새벽 배송으로 많은 물품을 구매하신다. 베이비부머 시대의 엄마가 이렇게 지내고 있을 정도이니 시장과 같은 옛날 거래 시스템이 사라져 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프라인 거래는 확실히 그 시간과 장소가 주는 특별한 재미가 있다.
불과 몇 년 전 거리에는 다양한 중저가의 화장품을 판매하는 가게가 많았다. 명칭도 그냥 로드숍이다. 더페이스샵, 미샤, 토니모리, 네이처리퍼블릭.. 그때의 나는 화장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친구들과 그런 가게에 들어가서 같이 구경하다가 자잘한 상품을 한 두 개 사는 것은 즐거운 '일과' 같은 것이었다. 이제 그런 가게는 올리브영이 유일하고 그마저도 돈이 안된다며 사라지고 있다.
조금 더 이전에는 PC방이 정말 많았고 모두가 PC방에서 게임을 하곤 했는데, 요즘엔 게임은 집에서 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다. PC 사양도 좋은데 굳이 밖에서 게임할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디스코드(게임할 때 자주 쓰이는 다중 통화 앱)를 쓰지 않고도 친구와 얘기하며 PC방에서 게임했던 경험은 각자의 집에서 넷에 접속해 노는 것과는 많이 다른 체험이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느껴지는 유대감이 더 깊고 큰 것 같다.
난 아직도 아케이드 게임을 좋아하는데, 아마도 그건 내가 오락실에 다니며 대전 게임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게임을 하면서 상대방이 어떤 표정으로 게임을 하는지, 조이스틱이나 버튼을 어떤 식으로 조작하는지, 사소한 습관까지 모두 알 수 있었다. 내 조카는 스플래툰을 재밌게 하고 있지만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른다. 조카는 키즈카페는 알아도 오락실이 뭔지는 모를 거다.
과거에 비해 오프라인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은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점점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같이 논다"라는 경험은 비싸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카페라던가 백화점은 그대로 있지만 대기업 소유의 건물 속에서 단일 판매자가 제공하는 상품이 아니라 여러 소매상인들을 만나는 일은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곧 그 대기업 소유의 건물도 사라지고 온라인 구매만 하는 세상이 올 것 같다. (지금도 마트에 가면 젊은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이마트나 홈플러스 같은 대형마트를 그리워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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